[문화일반] 추천영화 ‘소년의 시간’
남의 집 일이 아니다…경고등 켜진 10대 심리 보고서 ‘소년의 시간’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 넷플릭스 공개 뒤 전 세계 시청시간 1위
4부작을 보는 내내 도파민은 일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결론은 심란하기만 하다. 그런데 지난 13일 공개 뒤 19일 발표된 넷플릭스 시청시간 집계에서 전세계 시리즈 1위에 올랐다. 한국을 포함해 지금 전세계는 10대들에 관한 한 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의미다. 원제목이 ‘청소년기’(Adolescence)인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이다.
‘영민하고 수줍으며 평범한 당신의 13살 아들이 살인범으로 체포됐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드라마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여느 날과 다를 거 없던 아침, 현관문을 부수고 집에 들어온 경찰은 방에서 자던 제이미(오언 쿠퍼)를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한다. 얼어붙은 아이는 울면서 부인하고, 가족들은 경찰서로 달려간다. 아이를 달래며 경찰과 다투던 아빠(스티븐 그레이엄)는 시시티브이(CCTV)에 찍힌 현장 영상을 보며 망연자실해진다.

드라마는 회차별로 이야기를 나눈다. 2화는 형사(애슐리 월터스)가 제이미의 학교에 찾아가 범죄 원인과 도구를 찾는 과정, 3화는 몇달 뒤 시설에 들어가 있는 제이미와 심리학자(에린 도허티)의 면담, 4화는 다시 몇달 뒤 제이미의 가족이 겪는 곤경을 담는다.
굴곡 뚜렷한 드라마가 없는데도 한시간짜리 한 화를 단 한번의 끊김 없이 롱테이크로 찍어 마치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사실성을 재현한다. 특히 상담사와 제이미의 문답을 통해 제이미가 또래 사회에서 겪는 압박감, 성적 호기심, 수치심과 분노, 여성을 향한 공격성이 서서히 드러나는 3화는 탁구처럼 테이블 하나만 두고 펼쳐지는 전개인데도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불안과 폭력성, 교활함과 천진함까지 놀라운 감정의 진폭을 보여주는 오언 쿠퍼는 이 드라마가 연기 데뷔작이다.
‘소년의 시간’은 여성혐오 수위가 도를 넘어서고 왜곡된 남성성의 장으로 바뀌고 있는 10대의 교실과 문화에 대해 섣부른 분석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이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 천천히 되짚어본다.
2화에서 아무리 현장을 뒤져보고 면담을 해도 감을 못 잡는 형사에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힌트를 준다. 어른이 보기에는 평범하기만 한 인스타그램 댓글의 하트 색깔과 귀엽게 나열돼 있는 이모티콘 하나하나에 담긴 폭력적 의미들. 비자발적 순결주의자, 즉 연애 못 하는 무능한 남성을 의미하는 ‘인셀’, 20%의 남성이 80%의 여성을 차지한다는 20:80 법칙, 영화 ‘매트릭스’를 인용해 여성이 남성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레드필 이론’ 등 여성과 사회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10대 남성 커뮤니티의 은밀하지만 공고한 주장과 압력은 장난스러워 보이는 10대들의 에스엔에스(SNS) 피드에 암호처럼 가득 차 있다.

드라마는 여성 청소년 역시 이런 문화의 가해 행위에 동조하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걸 보여주면서 특정 성별만의 문제로 몰아가지 않는다. 또 어린 시절 자신은 맞으며 자랐어도 아이들만은 잘 키우고 싶었던 좋은 아버지, 즉 기성세대가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폭력성을 드러내는 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결국, 드라마는 지금 10대들의 문제는 스마트폰, 또래문화, 교육제도, 가족관계 등 한두개의 원인으로 분석할 수 없으며 단순명쾌한 해결책도 나올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2화 마지막에서 조사를 마치고 심란한 마음으로 학교에서 나온 형사는 서먹한 아들에게 밥 먹으러 가자고 한다. 어색해하던 아이는 가고 싶은 중식당의 특별한 소스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한다. 이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 말을 듣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지극히 평범한 가족에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악몽”이 남의 일만은 아닐 수 있다. 주연배우이자 제작자인 스티븐 그레이엄이 내놓은 기획 의도다.
출처 :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87940.html#ace04ou
2025-03-21,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