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라는 단어와 얼마나 친숙하십니까?

칼럼 |

∙ 자살을 자살로 부르자.

∙ ‘극단적인 선택’은 이제 그만

∙ 자살(Suicide)은 죽음의 한 종류일 뿐이다.

여러분들은 ‘자살’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친숙하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긴급을 요하는 전문상담사도 자살위기도 측정을 위하여 자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이 잘 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슨 이유에서 우리는 자살을 그렇게 어렵고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저에게도 이와 관련된 경험이 있습니다. 25년쯤일 것 같은데, 아주 친한 친구의 장인어른이시면서 친구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조문을 하였고, 당시에는 교통사고로 어른이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전 친구가 장인께서 당시 자살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자살 관련 상담을 하고 있었기에 털어 놓게 되었을 겁니다.

왜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만들고 경험하고 있고,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자살’은 스스로 목숨을 끊다. 라는 단어인데, 우리 사회는 이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하고, 글로 표현할 수 없어 ‘극단적 선택’이라는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살에 대한 대체어로 사용하고 있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의 조어 취지를 보면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문장을 만들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여러 선택지 가운데 자살자 본인이 택한 가장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부정적인 해석으로 사용되고 있고 인지되어 진 것이 사실입니다.

‘자살’은 특별한 의미를 붙일 이유도 없으며, 죽은 이를 부정적인 태도로 바라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많은 죽음의 종류 중에서 하나의 죽음일 뿐입니다. ‘극단적 선택’ 이것이 자살을 말해야하는 순간에 우리의 입을 틀어막게 하고 자살증후와 자살심리도 고통 받는 이들을 더욱 위축되게 만들고 감추게 하고, 숨게 만들어서 결국 치료받을 권리까지 뺏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암에 걸려 투병하고 있는 환자를 볼 때 우리는 왜 암에 걸렸느냐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울과 같은 병리현상으로 자살증후에 불안해하고 치료가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병과 잘 싸워 이겨내라고 격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숨지 않게 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우리 사회의 큰 암 덩어리 ‘자살’을 줄일 수 있고, 자살을 막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살’은 자살자의 의지와 선택이 아닙니다.  뇌가 작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며 스스로 죽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자살’이라는 단어를 어렵지 않게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그들은 나쁜 사람도 아니며, 귀신 들린 사람도 아닙니다. 암과 같이 간단하게 치료할 수 없는 병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힘든 병과 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살은 자연사, 교통사고사, 병사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자살’ 너무 힘들게 애쓰며 감추려하지 말고, 쉽게 말하고 떳떳하게 이야기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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